
업무 지시가 애매하면 머릿속이 안개 낀 것처럼 흐려집니다. 그런데 그 안개를 그대로 두고 달리면, 결국 벽을 한 번은 치게 됩니다. 질문을 잘한다는 건 많이 묻는 게 아니라, 상대가 말하지 않은 빈칸을 안전하게 채우는 기술입니다. 이 글은 업무 지시가 모호할 때도 무능이 아니라 프로처럼 보이도록, 질문법, 가정, 근거를 이용해 일을 또렷하게 만드는 방법을 쉽게 풀어드립니다. 읽고 나면, 다음 지시부터는 덜 불안하고 더 빠르게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질문법, 요약한 줄로 길을 만든다
모호한 지시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내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한 줄로 정리하는 습관입니다. 지시가 흐릿할수록 사람은 두 가지 극단으로 갑니다. 하나는 아무 말 없이 추측으로 진행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질문을 쏟아내며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길입니다. 둘 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약 질문을 먼저 씁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내가 이해한 목적, 범위, 기한, 결과물을 한 문장 안에 넣고, 마지막에 “맞을까요?”만 붙이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는 생각을 다시 길게 하지 않아도 되고, 그 자리에서 OK, 수정, 추가 중 하나를 고르면 됩니다. 이 방식이 왜 프로처럼 보이냐면, 질문이 정보 요청이 아니라 업무 정의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료 좀 정리해 주세요”라고 들었을 때 “어떤 자료요?”라고 묻는 대신 “이번 주 금요일 18시까지, A 프로젝트 관련 자료를 1) 진행 현황 2) 이슈 3) 다음 액션 형태로 정리해서 공유드리면 될까요?”라고 말하면, 이미 뼈대가 잡힙니다. 상대가 원하는 게 다르면, 그때 방향만 꺾어주면 됩니다. 질문이 ‘빈손’이 아니라 ‘초안’을 들고 가는 느낌이라서, 신뢰가 쌓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요약은 말로만 하면 쉽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짧게라도 기록을 남깁니다. 메신저에 “정리: 목적, 범위, 기한, 산출물”을 적어두면, 나중에 “그렇게 말한 적 없다” 같은 소모적인 상황이 줄어듭니다. 기록은 딱딱한 문서가 아니라, 안전벨트 같은 겁니다. 불편해 보이지만, 사고가 나면 생명을 지켜줍니다. 예시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팀장님에게 “보고자료 좀 더 보기 좋게 바꿔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겁이 나서 질문을 미뤘고, 밤새 표 색을 바꾸고 글씨를 정렬했습니다. 다음 날 팀장님은 화면을 보자마자 “아니, 디자인 말고 메시지 구조를 바꾸라는 거였는데”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해한 ‘보기 좋게’는 1) 핵심 결론 1줄을 맨 앞에 두고 2) 그래프 2개로 숫자를 보여주고 3) 페이지를 6장 이내로 줄이는 걸로 정리했습니다. 이 방향으로 가면 될까요?” 그때 팀장님은 바로 “결론 1줄은 좋고, 그래프는 1개만, 대신 리스크를 한 장 더 넣자”라고 답했습니다. 질문 하나로 밤샘이 사라졌고, 저는 그때 처음으로 질문이 일을 빠르게 만든다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가정, 말하지 않은 빈칸을 밖으로 꺼낸다
모호한 지시는 대부분 ‘가정’이 숨어 있어서 모호합니다. 말은 짧은데, 그 안에 포함된 조건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정을 내 마음속에서만 처리하지 않고, 대화 밖으로 꺼내서 보여줍니다. 이때 중요한 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단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제가 이렇게 가정했는데 괜찮을까요?”라고 선택지를 주는 태도입니다. 상대는 내 가정을 보고 고칠 수 있고, 그러면 일이 안전해집니다. 가정을 드러내는 질문은 특히 우선순위에서 강력합니다. 업무는 늘 동시에 밀려옵니다. 그런데 상사는 가끔 “이거 빨리”라고만 말합니다. 그 말은 듣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순위 가정’을 꼭 확인합니다. “이 건을 1순위로 올려서 오늘 안에 처리할까요, 아니면 기존에 하던 X를 마무리하고 내일 오전에 착수할까요?”처럼 묻습니다. 그러면 상대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이 곧 일정의 기준이 됩니다. 기준이 생기면, 불필요한 눈치가 줄어듭니다. 가정 질문을 더 프로답게 보이게 하려면, 선택지를 2개나 3개로 좁히는 게 좋습니다. 옵션이 7개면 상대는 피곤해집니다. 반면 “A로 가면 빠르지만 리스크가 있고, B로 가면 느리지만 안전합니다”처럼 정리하면, 상대는 판단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작은 근거를 한 줄 붙입니다. “지난번에 리스크 때문에 재작업이 있었어서요” 같은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근거가 붙으면, 질문이 ‘불안’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왔다는 인상을 줍니다. 예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마케팅팀과 같이 일할 때, 담당자분이 “랜딩 페이지 문구 좀 세련되게 바꿔 주세요”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세련되게라는 말이 제일 어렵습니다. 저는 예전 같으면 감으로 문구를 갈아엎었을 텐데, 그날은 가정을 꺼냈습니다. “제가 세련됨을 1) 문장 길이를 1 문장 20자 내외로 2) 어려운 단어를 쉬운 말로 3) CTA를 ‘지금 확인’처럼 짧게, 이렇게 가정했습니다. 또 톤은 ‘친근’과 ‘전문’ 중 어느 쪽이 맞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담당자분은 바로 “친근이요, 그리고 CTA는 ‘무료로 보기’가 좋아요”라고 답했습니다. 그 뒤로 작업이 놀랍게 빨라졌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가정은 숨기면 폭탄이고, 꺼내면 지도라는 걸요. 지도 위에서 달리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근거, 감 대신 기준을 세우면 일이 흔들리지 않는다
모호함이 계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근거’가 없는 말이 오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요즘 반응이 안 좋아요”, “이게 별로예요”, “좀 더 고급스럽게” 같은 말은 나쁘지 않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면 작업은 끝없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근거를 묻습니다. 다만 “왜요?”라고 날카롭게 묻지 않습니다. 대신 목적을 먼저 말합니다. “근거를 알면 제가 우선순위를 정확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깔아 두면, 상대도 방어적이지 않게 이야기합니다. 근거를 묻는다고 해서 항상 숫자만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KPI, 전환율, CS 건수 같은 숫자는 강력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고객이 어떤 표현에서 멈췄는지”, “리뷰에서 어떤 단어가 반복되는지” 같은 정성 근거도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판단의 기준’을 함께 만드는 겁니다. 기준이 만들어지면, 다음부터는 “감”이 아니라 “합의된 체크리스트”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준을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쉬운 편입니다. 예를 들어 “문장을 더 간결하게”라는 지시가 있다면, 간결함을 3가지로 쪼개면 됩니다. “1) 중복 표현 삭제 2) 한 문장에 한 메시지 3) 전문 용어는 괄호로 풀이”처럼요. 이렇게 쪼개면, 간결함이 눈에 보입니다. 눈에 보이면, 고칠 수 있습니다. 고칠 수 있으면, 일정과 품질을 같이 잡을 수 있습니다. 예시를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제가 고객 보고서를 만들던 날, 상무님이 “이거 너무 밋밋한데, 임팩트 있게 바꿔요”라고 하셨습니다. 임팩트라는 단어는 정말 넓습니다. 저는 잠깐 숨을 고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팩트를 판단하신 근거가 궁금합니다. 숫자가 약해서인지, 메시지가 분산돼서인지, 아니면 경쟁사 대비 포인트가 부족해서인지에 따라 접근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상무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숫자는 괜찮은데, 결론이 늦게 나와서 답답해”라고 하셨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 기준이 생겼습니다. 저는 첫 페이지에 결론을 박고, 두 번째 페이지에 근거 숫자를 배치하고, 세 번째 페이지에 리스크와 대응을 붙였습니다. 다음 회의에서 상무님이 “이번엔 딱 보이네”라고 하셨을 때, 저는 속으로 확신했습니다. 근거를 묻는 질문은 예민한 행동이 아니라, 일을 정확하게 만드는 친절한 행동이라는 걸요.
모호한 지시는 누구에게나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부담을 혼자 끌어안으면, 결국 재작업과 오해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요약 질문으로 길을 만들고, 가정을 밖으로 꺼내 선택지를 주고, 근거를 물어 기준을 세우시면 됩니다. 질문은 늦추는 게 아니라, 방향을 맞춰 속도를 높이는 장치입니다. 오늘 한 번만이라도 “제가 이렇게 이해했는데 맞을까요?”라고 시작해 보세요. 그 한 문장이, 일을 편하게 만들고 신뢰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