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사가 시키는 일이면 일단 해야지”라는 마음과 “이건 내 담당이 아닌데…”라는 불편함 사이에서 매번 흔들리는 직장인들이 계실 겁니다. 특히 업무 범위 밖 요청이 들어올 때,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일을 지키는 말의 기술을 정리했습니다. 거절은 차갑게 끊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일의 경계를 다시 그리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안 됩니다’라는 한마디 대신, 왜 어려운지, 무엇이 충돌하는지, 어떤 선택지가 가능한지를 차분히 꺼내는 방법을 다룹니다. 읽고 나면 당장 내일 아침, 같은 상황이 와도 말이 막히지 않도록 문장 틀과 흐름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업무범위를 정중하게 되짚는 말의 순서
업무 범위 밖 요청을 받았을 때 가장 흔한 실수는, 마음속에서 먼저 “이건 내 일이 아니야”라고 단정한 뒤 바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문이 튀어나오면 상대는 내용보다 태도를 먼저 듣습니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저는 ‘요청을 다시 설명해 달라 → 목적을 확인한다 → 담당 경계를 언어로 보인다’ 이 세 단계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말씀하신 작업이 어떤 산출물에 들어가는지 먼저 정리해도 될까요?”처럼 요청을 다시 잡아주면, 상대도 한 템포 느려집니다. 그다음에는 “이게 필요한 이유가 의사결정용인지, 공유용인지”를 묻습니다. 목적이 정해지면 범위도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마지막으로는 경계를 ‘사람’이 아니라 ‘업무 구조’로 보여주는 게 안전합니다. “제가 맡은 파트는 이번 캠페인 성과 분석까지고, 디자인 시안 제작은 크리에이티브 파트가 주 담당으로 알고 있습니다”처럼요. 여기서 말투는 부드럽게, 문장은 짧게 가는 편이 좋습니다. “제가 못해서요”가 아니라 “현재 제 역할 정의상 이 요청은 다른 담당 영역에 더 가깝습니다”라고 말하면, 능력 문제가 아니라 분장 문제로 정리됩니다. 동시에 완전한 차단보다는 ‘가능한 접점’을 남겨두면 관계가 편해집니다. “대신 제가 필요한 데이터는 바로 뽑아드릴 수 있습니다”처럼 작은 다리를 하나 놓는 방식입니다. 어느 날 상사께서 회의 30분 전, 발표 자료의 ‘디자인 톤’까지 손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지만, 저는 “자료의 핵심 메시지는 지금 버전으로 충분히 전달됩니다. 다만 디자인 수정까지 하면 내용 검증 시간이 줄어듭니다”라고 먼저 리스크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 크기와 표 정렬만 빠르게 정리하고, 전체 템플릿 개선은 다음 회의 전에 시간 잡아 진행하면 어떨까요?”라고 범위를 쪼갰습니다. 결과적으로 상사는 급한 불을 끄면서도, 제가 ‘반항’이 아니라 ‘정리’를 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업무 범위를 지키는 말은 결국, 대화의 방향을 감정에서 구조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우선순위 협상은 ‘선택의 문장’으로 만든다
업무 범위가 애매한 요청은 실제로 많습니다. 이럴 때는 “할까요, 말까요”로 싸우기보다 “무엇을 먼저 할까요”로 판을 바꾸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우선순위 협상에서 핵심은 상사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정보를 ‘한 장’으로 정리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머릿속으로 늘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냄비가 세 개 동시에 끓고 있을 때, 다 끓이겠다고 욕심을 부리게 되면 결국 다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업무도 비슷합니다. 실제로 쓸 문장은 간단합니다. “지금 제 작업 목록 기준으로는 ○○와 △△가 같은 시간대를 경쟁합니다. 어느 쪽을 먼저 잡을지 정해주시면 그 기준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이 문장이 좋은 이유는, 상대가 ‘요청자’에서 ‘의사결정자’로 역할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으면 협상이 더 매끄럽습니다. 바로 ‘완성도 옵션’입니다. “오늘 안에 필요하시면 요약본으로, 내일까지 여유가 있으면 근거까지 포함한 정식본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처럼 시간과 품질을 맞교환하는 선택지를 주는 겁니다. 월말 마감이 걸린 날, 상사께서 갑자기 “이번 분기 경쟁사 자료도 같이 정리해 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네’부터 나왔겠지만, 그날은 다르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내부 실적 정리가 마감 직전이라, 경쟁사까지 넣으면 검증이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부 실적을 ‘확실히’ 마무리하고, 경쟁사는 내일 오전에 핵심 지표 5개만 추가하는 방식은 어떠실까요?”라고요. 상사는 잠깐 고민하더니 “좋아, 오늘은 내부 먼저 확실히”라고 결정했습니다. 이 한 번의 경험이 알려준 건 단순합니다. 우선순위 협상은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선택지를 보기 좋게 진열하는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지는 ‘상사가 책임질 수 있는 형태’여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일이 과부하로 무너질 때, 책임이 나에게만 남지 않습니다.
거절 대신 ‘조건부 수락’으로 관계와 성과를 동시에 잡기
상사의 요청이 부담스럽더라도, 조직에서는 완전한 거절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조건부 수락’이라는 길을 씁니다. 핵심은 “어떤 조건이면 가능하다”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입니다. 조건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범위를 줄이는 조건(핵심만 처리). 둘째, 수행 방식을 바꾸는 조건(내가 만들지 않고 검토하거나 연결). 셋째, 기한을 재조정하는 조건(지금은 불가, 특정 시점 가능).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잡아도 대화는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습관은 ‘짧은 기록’입니다. 기록은 상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기억이 매번 다르게 남기 때문입니다. 저는 길게 쓰지 않습니다. 메신저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말씀하신 ○○건은 오늘은 △△ 마감 영향이 있어, 1) 핵심 항목만 오늘 처리 2) 전체 버전은 내일 오전 제공 중 어느 방향으로 진행할지 알려주시면 맞추겠습니다.”처럼, 선택지와 기준을 함께 남겨두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 일정이 꼬였을 때도 “그때 이 기준으로 결정하셨습니다”라고 차분히 되짚을 수 있습니다. 상사께서 “회의록까지 네가 정리해 줘”라고 하셨는데, 제 역할은 원래 프로젝트 운영이 아니라 데이터 분석이었습니다. 저는 “회의록을 제가 전부 작성하면 분석 시간이 줄어 결과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먼저 영향을 말했고, 곧바로 “대신 회의에서 결정된 액션 아이템만 제가 표로 정리해 드리고, 상세 발언 기록은 참석자 중 한 분이 초안 작성 후 제가 마지막에 체크하는 방식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상사는 처음엔 “그냥 네가 해”라고 밀어붙였지만, 제가 “그럼 분석 결과 공유가 하루 늦어질 수 있는데 괜찮으실까요?”라고 되물었을 때,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액션 아이템 정리로 합의됐고, 저는 제 핵심 업무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배운 건, 상사는 종종 ‘일이 돌아가기만 하면’ 좋다는 점입니다. 즉, 내가 전부 떠안지 않아도, 일이 굴러가는 설계를 보여주면 협상은 의외로 빨리 끝납니다.
업무 범위 밖 요청을 부드럽게 조율하는 사람은 말을 세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준을 분명히 하고, 충돌 지점을 설명하고,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결국 상사가 원하는 것도 “네가 다 해라”가 아니라 “결과가 제때 나오게 해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는 한 가지 문장만 연습해 보셔도 좋습니다. “가능은 한데, 이걸 넣으면 무엇을 빼야 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갈까요?”라는 문장입니다. 이 질문 하나가 관계를 망치는 거절을, 일을 살리는 협상으로 바꿔줍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당신은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조율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